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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몇) 한국 기독교인들이 갖고 있는 비극적인 추상성을 생각하며.. 본문

내 주변 이야기

(몇몇) 한국 기독교인들이 갖고 있는 비극적인 추상성을 생각하며..

가람스나이퍼님 (Joshua_Choi_Brother) 2021. 5. 6. 21:20

(퍼온것입니다. 여기에 들어오신분들은 함께 나누면 좋을것 같아서 공유합니다.)

 

속상해서 쓴소리 좀 하겠습니다. 제가 (몇몇) 기독교인들에게 갖고 있는 우려 중 하나는 [현실성]이 없다는 겁니다. 추상적이고 무지합니다. 본인도 현실에 발 딛고 살면서 말하는 건 산신령입니다. 관조하는 듯 평가하고 비판하는 걸 믿음 좋은 걸로 착각합니다.

부끄러운 줄 알고 책 좀 읽자 하면 어김없이 ‘배설물 드립’ 나옵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을 아는 지식을 가장 고상하게 여기며 다른 것을 배설물로 여겼다는 것이지요. 한 마디로 세속적이라 이겁니다.

그러나 그들은 알까요. 바로 그 사도 바울이 아테네에서 전도할 때 다신론주의자들인 “에피메니데스(Epimenides)와 같은 이교 철학자라든가 아라토스(Aratus)라고 이름하는 그리스 시인 말을 인용”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럼 사도 바울은 자신이 알고 있는 인문철학지식으로 하나님을 증거했으니 배설물로 불경스럽게 전도한 겁니까.

인간의 지혜로운 말을 의지하지 않고 우직하게 십자가만 전했던 것도 바울이며 세상지식으로 기독교를 변증한 것도 바울입니다. 알면서도 주를 위해 절제하는 것과 아예 몰라서 말 못 하는 것이 어떻게 같습니까.

C.S.루이스, 알리스터 맥그래스, 존 레녹스 같은 기독교 지성인이 성경’만’ 인용하여 기독교를 변증을 했습니까. 그렇다면 존 레녹스가 리처드 도킨슨과 어떻게 공개 토론하며 ‘과학적 사고방식’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 드릴 수 있었겠습니까.

 

 

왼쪽부터 C.S.루이스, 알리스터 맥그래스, 존 레녹스

 

이 시대에 필요한 건, [예수에 사로잡힌] 정치가, 과학자, 심리학자, 정신분석학자, 경제학자, 뇌과학자, 문학가, 대중예술가, 방송국PD, 사진가, 스포츠 선수, 요리사, 사업가, 공무원 등등입니다. 세상에선 아무런 영향력도 끼치지 못하고 교회에서 터줏대감 노릇 하는 허약한 크리스천이 아닌, 복음의 야성으로 세상을 뜯어고치는 ‘5달란트 받은 신실한 (동시에 실력도 출중한) 주의 종들’이 필요하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영성이 실력이고 실력도 영성이라 한 거고요.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요. 철저히 훈련하고 배워야죠. 합격하기 위해, 정정당당하게 승진하기 위해, 더 나은 조건으로 이직하기 위해, 더 월등한 성과를 내기 위해 배우고 연습하고 실패하더라도 부딪혀야죠. 독서는 기본입니다. 남들 유튜브, 넷플릭스, 예능 프로그램 볼 때 성경 정독하면서 기도 매진하면서 자기 전문 서적도 함께 읽어야죠.

오직 주께 영광을 위한 우리들의 이 피나는 노력을 하물며 막스 베버가 인정하지 않았습니까.

 

막스 베버 그리고 그의 저서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그런데 (몇몇) 기독교인들 현실 인식 수준은 너무도 안타깝습니다.

자유민주주의, 자본주의, 자유시장경제와 성경의 유의미한 상관관계에 대한 이해 없이 분열주의자들이 떠벌리는 프로파간다에 동화되어 학술적 팩트를 말해도 인상부터 찡그립니다(물론 그럴 수 있습니다. 다만 객관적인 척, 복음적인 척하는 은밀한 교만이 문제이지요).

모호한 긍정주의는 기복신앙으로 흐를 수 있으니 냉철한 현실 인식을 해야 한다고 말하면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없다고 하거나(그러나 진정한 믿음과 하나님의 크신 기적은 냉철한 현실 인식을 바탕으로 한 크리스천의 자기부인과 순종을 통해 이뤄집니다).

젠더 이데올로기가 법제화되면 창세기 1장을 비롯 성경 말씀이 ‘차별을 종용하고 사회를 분열시키는’ 위법 서적으로 낙인해 온갖 반기독교적 사회 운동의 명분이 될 수 있으니 특정 정치인, 정치 이념이 아닌 ‘보다 기독교에 열려 있는’ 당론을 보고 투표하라 하면 정치 얘기 그만하라 핀잔을 주는 겁니다(가장 신앙적인 이야기인데도 말이지요).

 

 

웨인 그루뎀과 그의 저서들

 

이 모든 근본 이유는 신앙생활의 피상성. 추상성입니다. 나 자신의 무지를 알지 못하는 비극입니다. 우리들의 수준이 도대체 몇 년이나 뒤처져 있는지 모릅니다. 손가락질이 아픈 게 아니라, 아직도 ‘그 손가락질’하는 모습 자체가 절망적입니다.

나부터 회개합시다. 진정한 회개의 마침표는 내 생각과 습관의 변화입니다. 나부터 바뀌어야 됩니다. 예수 믿는 길 어차피 고난의 길입니다. 종교를 차치하더라도 인생은 고통입니다.

그러니 어설픈 종교생활 박살 내고 우리 정말 제대로 믿읍시다. 차라리 싫으면 “싫다”라고 합시다. 괜히 종교적 변명으로 물 흐리지 말고.

이 글을 읽는 여러분들 중에서 세상이 감당치 못하는 [바로 그 크리스천] 되시길 진심으로 응원합니다.

ps. 이 글을 쓰고 있는 저 자신도 부족하고 교만합니다. 오직 은혜 받은 자의 자격으로 말합니다.